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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전문

프라하

PRAGUE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구시가의 아름다운 거리가 특히 매력적인 도시, 유럽 에는 여러 차례의 전쟁으로 도시 전체가 파괴되는 막대한 피해를 입은 도시들이 많은데 그 오랜 세월 동안 프라하만은 한번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아서 11세기부터 18세기의 건축이 그 대로 남아있는 기적적인 역사적 경관을 유지하고 있다. 미술과 음악, 문화가 번성했던 도시 이기도 해서 거리 곳곳에서 다양한 예술과 지성을 만날 수 있고, 1948년부터 1990년까지 지속되었던 공산주의 정부의 엄혹한 시절 또한 공존하고 있어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유유히 흐르는 블타바강과 백 개의 첨탑이 이루는 도시의 스카이라인 너머로 저무는 해는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몰로 손꼽힌다.

1. 바츨라프 광장

20세기 체코 역사에서 가장 중대한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난 곳.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공 화국이 탄생했을 때, 1939년 나치의 침공 때, 1968년 프라하의 봄이 터졌을 때, 1989년 벨 벳 혁명의 고요한 폭풍이 일었을 때도 바츨라프 광장이 그 중심에 있었다.

말과 곡물을 사고 팔던 시장이 있던 곳으로 보헤미아 민족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조성된 국 립박물관과 보헤미아 민족의 수호성인, 성 바츨라프의 기마상이 자리하고 있다. 체코 역사는 여러모로 헝가리의 역사와 닮았다. 체코인은 머저르족이 부다페스트를 차지한 것보다 조금 앞선 9세기 말 보헤미아에 왕국을 세웠다. 14세기 이후 룩셈부르크 왕가를 거쳐 합스부르크 왕가로 지배권이 넘어갔다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립된 공화국이 된 것도 잠시, 나치 와 소련의 침략을 차례로 받았고 1993년 체코슬로바키아가 무너진 후 체코공화국이 되었다. 그런 역사 속에서 성 바츨라프는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처럼 체코의 민족성을 잊지 않게 하 는 영웅의 역할을 했다.

성 바츨라프의 기마상 옆으로 자유의 아이콘이 된 두 명의 얀(Jan)을 기리는 석판이 있는데, 민족의 자주독립에 대한 열정과 프라하의 봄을 무력으로 짓밟은 소련의 압제에 대한 항거로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인 청년 얀 팔라흐 (Jan Palach) 와 그 한 달 뒤 같은 선택을 한 얀 자 이츠 (Jan Jajic)이다. 카를 대학교에서 철학과 역사를 공부하던 학생이었던 그는 억울함과 분노을 삼킬 수 없어 목숨을 던졌을 거다. 그 울분에 동참하듯 그의 장례식은 대규모 시위 로 번졌고 연이은 청년들의 분신으로 이어졌다.

독일로 망명한 체코의 천문학자는 자신이 발견한 소행성에 팔라흐의 이름을 붙였고, 20년 후 공산주의가 무너지자 프라하 시민들은 그가 목숨을 던진 장소에 청동상을 세웠고, 카를 대학교 철학부 앞 광장의 이름을 얀 팔라흐 광장으로 개명했다.

민족의 자존과 자유를 갈망했던 보헤미아 민중의 열망을 대변한 별들이 모두 이곳 광장에 자리하고 있다.

2. 구시가 광장

중세의 프라하는 작은 도시였다. 구시가지 광장의 틴 성당을 중심으로 서쪽과 북쪽은 블타 바 강, 동쪽은 화약탑, 남쪽은 하벨 시장까지가 전부였다. 이 공간을 프라하의 구시가라고 한다. 그러다 14세기 후반 구시가 동남쪽에서 지금의 바츨라프 광장까지 포함한 신시가지를 조성하면서 도시가 몇 배로 커졌다. 600년도 더 된 신시가지라니. 그만큼의 오랜 역사를 담 고 있는 프라하의 심장, 구시가 광장은 천년 넘는 시간이 켜켜이 쌓여있는 공간이다.

천문시계탑

시대를 달리하는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이곳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차 지하는 건물은 천문시계탑으로 유명한 구시청사 건물이다. 600년 넘게 원형에 가깝게 보존 되어 있는 구시가의 명물로, 처음 작동을 시작했던 1410년부터 수리나 보수가 필요할 때를 제외하고는 한번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 위쪽에는 천동설에 기초한 태양과 달을 포함한 행 성의 움직임과 함께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가, 아래쪽에는 12개의 별자리와 시기별 농사법을 그려 넣은 일종의 달력이 설치되어 있다. 황금색 현판이 매일 한 눈금씩 돌면서 오늘에 해 당하는 별자리와 해야 할 일을 함께 알리는 기능은 별자리의 배치를 보고 시간을 파악했던 당대 사람들이 글을 몰라도 별자리를 확인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매시 정각마다 시계 인형이 나와 보여주는 퍼포먼스를 구경하기 위해 인산인해를 이룬다.

얀후스 동상

독일에서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가 등장하기 100여 년 앞서 체코에는 얀 후스(Jan Hus)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여러모로 시대를 한참 앞서간 인물이었는데, 원래는 프라하 카를 대학 의 교수였다. 성직자가 된 후에 신자들이 알아들어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던 그는 .종교 의 전을 라틴어를 쓰라는 로마 교황청의 지침을 무시하고 체코의 언어로 설교를 했고, 믿음의 근거는 교회 자체보다 성서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사제들의 범죄행위와 부정부패를 가차 없이 비판했다. 로마 교황청이 면죄부를 판매한 것을 비판한 일이 화근이 되어 교황청 으로부터 이단으로 파문당해 프라하에서 추방되었다. 프라하를 떠나 시골에 머물며 논문을 쓰다가 함정에 빠져 체포되어 고문당하고 화형에 처해졌다. 그는 죽음 이후에 더욱더 영향 력이 커졌는데 그의 정신을 이어받은 후스파라는 정치 결사가 출현해 낡은 질서에 반기를 들었다. 교황청은 이를 체제 전복의 시도로 여겨 십자군을 보냈고 급진파 후스파는 12년 동 안 다섯 번의 침략을 물리쳤지만 온건 후스파가 교황청과 손잡고 배신해 결국 패배했다. 그 러나 온건 후스파는 교회의 정치개입을 배제하는데 성공한 결과를 얻었고 세속 귀족정을 일 찍 정착시켜 오늘날 체코 내 무신론자가 절반이 넘는 사상적 기반을 만들었다. 100여 년 후 마틴 루터가 얀 후스와 똑같은 논리로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공개 비판했고 종교개혁 운 동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 농민봉기와 내전을 촉발시켰다. 30년에 걸쳐 벌어졌던 전쟁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끝이 나며 결국 종교 선택의 자유가 인정되었고 하나의 관습 이 깨지며 봉건체제라는 또 다른 낡은 관습의 해체를 재촉했다.

얀 후스가 죽은 지 500년이 지난 1915년 세워진 구시가 광장의 동상에는 그가 감옥에서 보 낸 편지의 구절을 인용한 글귀가 체코어로 새겨져 있다. ‘진실을 사랑하고, 진실을 말하고, 진실을 행하라.‘

틴 성당

정식 명칭은 틴 앞의 성모 성당(Kostel Panny Marie Před Týnem). 틴(Týn)은 ’담을 두른 공 간‘이라는 뜻의 체코어로 영어의 타운(Town)과 그 어원이 같다. 운겔트(Ungeld)라고도 불리 는 조용한 작은 광장은 프라하 구시가지 내에서도 가장 오래된 곳으로 보헤미아에 무역을 하러 들어온 원거리 상인들을 위한 장소였다. 동유럽 슬라브족 거주지역을 통틀어 가장 큰 시장이 있었던 이곳에서 온갖 물자들이 모여 거래되었고 숙박업소, 술집, 식당, 병원까지 있 었다고 하니 이 작은 광장 자체로 하나의 중세 도시였다.

틴 성당은 원래 조그만 교회가 있던 자리에 상인들의 기부금을 재원으로 14세기 후반부터 공사를 시작했다. 고딕 양식 본체를 세우는 동안 백 년이 흘렀고 첨탑 두 개를 올리는데 50 년이 더 걸렸다. 두 첨탑은 오른쪽의 높이가 살짝 더 높은데 오른쪽이 아담, 왼쪽이 이브라 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성당 주변의 민가와 건축물들을 없애지 않고 도시 속에 안긴 듯 자 리한 모습이 독특하다.

30년 전쟁 후 보헤미아가 독립 왕국의 지위를 완전히 잃고 합스부르크 왕가에 복속되자 다 시 권력을 탈환한 카톨릭 세력이 원래 거기에 있던 보헤미아의 조각상과 황금 성배를 녹여 황금 후광을 두른 성모 마리아상을 만들어 내걸었다. 자신들의 권세를 과시하기 위한 디자 인 변경이었다. 카톨릭 세력은 또 다른 경고의 메시지로 1621년 6월 21일, 27명의 후스파 지도자를 참수해 구시가 광장에 내걸었다. 낮이 가장 긴 하지의 태양 아래 오랫동안 전시하 기 위한 기획이었다고 한다. 현재 구시청사 옆 바닥에는 틴 성당의 황금 후광을 두른 성모 마리아가 똑똑히 바라볼 수 있도록 27개의 작은 십자가와 그 참혹한 날의 날짜를 새겨 놓 았다.

3. 카를교

도시 프라하는 카를교를 중심으로 나누어지고 또 이어진다. 입구에 우뚝 선 교탑을 통과하 면 다리를 따라 양옆으로 늘어선 서른 개의 석조 조각상과 거리 예술가들의 공연, 기념품 노점,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들 그리고 사람들로 언제나 붐빈다. 그래서 다리라기보다 오히려 강 위의 광장 같다. 건너는 것을 잊는 다리, 카를교에는 유일하게 청동으로 제작된 동상이 있다. 성 얀 네포무츠키의 동상이다. 머리에는 다섯 개의 별이 후광으로 드리워 있고 손에는 순교자를 상징하는 종려나무와 십자가가 있다. 좌대에는 성인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가 새 겨진 2개의 부조가 있는데 소원을 들어준다는 전설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의 수많은 손길이 오랜 세월 모여 밝은 빛을 내고 있다.

프라하의 마법의 주인공, 얀 네포무츠키는 왕비의 고해성사를 담당했던 신부였다. 왕비를 의 심했던 바츨라프 4세가 신부를 불러 고해성사의 내용을 알아내려 했는데, 원칙대로 고해성 사의 내용을 말하지 않은 네포무츠키 신부에게 앙심을 품은 왕이 그의 혀를 뽑고 카를교 아 래로 던져버렸다고 한다. 신부가 떨어진 후 다리 근처에서 다섯 개의 별이 떠올랐고 그 별 이 뜬 자리에서 시신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후에 죽음의 순간 앞에서도 고해성사를 지 킨 얀 네포무츠키 신부는 성인으로 추대되었고 프라하의 성 비투스 성당에 안치되었다.

카를교는 보헤미아 왕으로는 최초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카를 4세로부터 나왔다. 부 계는 룩셈부르크 왕가, 모계는 보헤미아 왕가 출신이었는데 그는 프라하를 신성로마제국의 수도로 삼고 신시가지를 조성했다. 뿐만 아니라 중부유럽 최초의 대학을 설립해 관료와 법 률가를 양성하고 학문연구와 예술 활동을 장려했다. 프라하성과 성 비투스 성당의 건축도 주도했으며, 자녀들의 정략혼인을 통해 독일에 대한 영향력을 키웠고 스위스 티롤지방과 이 탈리아 북부로 영토를 확장하여 세 아들과 조카에서 땅을 나눠주었다. 보헤미아의 황금기를 연 이 왕은, 프라하성까지 이어지는 왕의 길에 위에 놓인 이 다리부터 대학, 광장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곳에 이름을 남겼다.

캄파섬

구시가지에서 카를교를 건너 계단을 내려가면 있는 작은 인공섬이다. 주택과 운하가 있는 도심 속 한적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체코 출신의 세계적인 설치미술가, 다비드 체르니의 조각상 <오줌싸는 남자들>,<아기들>을 비롯한 설치 미술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존 레논 벽

존 레논 벽은 몰타 대사관의 일부로 원래는 그냥 평범한 벽이었으나 1960년대 이후 사랑에 관한 시와 정권에 저항하는 짧은 메시지들이 적히는 장소였다. 1980년 존 레논이 피살되자 익명의 화가가 이 벽에 존 레논의 얼굴과 그의 노래 가사 일부를 그린 것으로 존 레논 벽으 로 불리게 되었다. 프라하의 봄으로 잠깐 동안의 민주화와 정치적 자유를 맛보았으나 공산 정권이 들어서자 자유를 잃은 사람들은 분노와 저항감을 이 벽을 통해 표현했다. 몰타 대사관은 치외법권과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며 이 그래피티들을 보호했고 그 덕분에 이 전통이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었다.

4. 프라하성

프라하성은 단일 건축물이 아니라 성채 단지로 9세기 말부터 건설된 성당, 왕궁, 수도원, 정 원 등 건축 시기과 스타일이 저마다 다른 여러 건물이 한 덩어리로 얽힌 복합 공간이다. 보 헤미아의 왕들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거주했고 지금은 대통령관저가 있으며, 주변에는 국방부, 문화부를 비롯한 정부 부처 청사와 외국 대사관들이 포진해 있다. 언덕에 위치해 있 어 프라하 성 앞 광장에서는 프라하 시내의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성 비투스 대성당 (St. Vitus Cathedral)

체코의 수호성인으로 시성된, 바츨라프 1세가 성 비투스의 성해 중 어깨를 기증받고 이를 헌정하기 위해 프라하에서 가장 높은 곳에 지은 로마네스크 교회가 기원이 되었다. 그 후 성채를 보기 위해 몰려드는 기독교 순례자들을 감당할 수 없어 11세기 초에 기존 성지를 허물고 바실리카로 개축했고 14세기에 대주교 성당으로 승격되자 새로운 고딕 양식의 대성 당을 짓기로 하고 주춧돌을 놓았다. 전쟁과 전염병으로 짓다 멈추기를 반복하며 500년 동안 미완성인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가 19세기에 다시 짓기 시작해 20세기 초에 이르러 완공된 성당이다. 내부에는 성 얀 네포무츠키가 안치된 묘역과 함께 왕족들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고 알폰소 무하의 감각적이고 장식적인 화풍이 그대로 반영된 스테인드 글라스로 유명하다.

성 이르지 성당 (St. George’s Basilica)

프라하 성 내 두 번째로 지어진 성당으로 바츨라프 1세의 아버지인 브라티 슬라브 1세 대 공이 지었다. 처음 지어질때는 목조 성당이었는데 화재 등으로 재건을 반복하다 18세기에 성 얀 네포무츠키 예배당과 연결하여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 되었다가 20세기에 들어와 현 재의 모습인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복원되었다. 비투스 대성당에 비해 소박하고 편안한 분위 기이다.

황금소로 (Golden Lane)

성 이르지 성당 오른쪽에 아주 작은 골목길을 따라가면 황금 소로로 연결된다. 15세기 북쪽 에 성곽을 새로 지으면서 조성된 곳으로 성의 방어를 위해 병사, 하인, 장인, 건설 노동자들 그리고 일반 백성들이 들어와 살았다. 금 세공사들이 모여 살아서 황금소로라 불리게 되었 는데 제2차 세계 대전까지는 실제 거주지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22번지 집은 프란츠 카프카 의 누나가 세들어 살던 집으로 1916년 겨울 동안 카프카가 머물면서 글을 썻다고 한다.

네루도바 거리 (Nerudova)

구시가지의 화약탑에서 카를교, 네루도바 거리를 거쳐 프라하성까지 이어지는 길을 왕의 길 이라 불렀다. 왕의 대관식이나 중요한 행렬이 거쳐 갔던 길로 이제는 레스토랑과 상점, 카페 가 줄지어 있는 번화한 거리가 되었다. 이 거리에 살았던 체코인들이 사랑하는 시인 얀 네 루다(Jan Neruda)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집집마다 문 위에 그림이나 조각을 걸어 둔 문패 를 발견할 수 있는데 숫자로 된 번지수 체계가 들어오기 전에 집주인의 직업, 상가의 경우 취급 품목 등을 내걸어 집을 찾기 쉽도록 만든 것이다.

5. 비셰흐라드

높은 곳(Vyše)의 성(Hrad) 이라는 뜻의 비셰흐라드는 체코 건국 설화의 배경이 되는 장소이 다. 이 지역에 처음 정착한 체흐(Čech) 민족의 부족장 크로크(Krok)는 이 곳 비셰흐라드 인 근에 도성을 세웠다. 그의 세 딸 중 가장 영특하고 미래를 예언하는 능력을 가진 셋째 딸 리부셰(Libuše) 공주가 아버지의 권력을 이어받았는데, 어느 날 비셰흐라드의 강 건너편에 당장 누추할지라도 남들이 예를 갖추는 장소에서 영광이 별빛까지 이르는 도시가 세워질 것 이라는 예지몽을 꾸게 된다. 그리고는 꿈에서 본 한 농부를 찾아 결혼하고 그 도시를 다스 리게 될 왕조를 세웠는데 이것이 보헤미아 최초의 왕조 프르제미슬(Přemysl) 왕조의 시작이 다. 공주는 지금의 프라하성 인근의 허름한 집을 지나다 한 노인이 문지방을 수리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지면보다 높게 솟은 그 문지방을 넘어 집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절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공주는 바로 이곳이 꿈에서 본 당장 누추하지만 예 를 갖춰야 하는 장소임을 깨닫고 도성을 옮기기로 결정했는데 이 전설이 바로 프라하의 기 원이다. 프라하의 어원이 된 Prah는 체코어로 문지방이라는 뜻이다.

비셰흐라드에는 규모는 작지만 아름답게 조성된 묘지가 있는데 세계적인 작곡가 드보르작 (Antonín Dvořák)과 스메타나(Bedřich Smetana), 화가 알폰스 무하(Alfons Mucha) 등 체코 출신의 위대한 예술가들이 혼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비셰흐라드 성곽은 프라하 최고의 뷰 포인트이기도 한데 스메타나의 교향시 <나의 조국> 과 너무나 어울리는 장소이다. 1악장 <비셰흐라드>와 2악장 <블타바>를 들으며 프라하의 전경을 조용히 감상해보자.

6. 체스키크롬로프

작은 프라하, 보헤미아의 진주라 불리는 동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도시. 블타바강이 마을 을 휘감고 돌아 마치 섬처럼 자리 잡고 있는 체스키크롬로프는 동화 속 풍경처럼 아기자기 한 매력으로 체코에서 프라하 다음으로 가장 많은 방문객들을 끌어들이는 곳이다. 중세의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18세기 이후에 지어진 건물이 거의 없는 곳이다. 보 헤미아라고 하면 상상할 수 있는 그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영화 아마데우스와, 일루셔 니스트의 촬영지로도 사용되었는데, 오밀조밀 아담한 도시 전체가 영화 세트장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수공예와 무역으로 경제적으로 부유했고 평화로운 역사를 가진 덕분에 중세 시대의 도시구조와 구성요소를 잃지 않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 다.

보헤미아의 한 영주에 의해 성이 지어지면서 주변에 마을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 13세기, 이후 500여 년 동안 성의 주인이 바뀌고 여러 차례 증축되며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프라하성에 이어 체코에서 두 번째로 큰 성으로 도시의 크기에 비해 규모가 꽤 커서 체스키 크롬로프를 지배했던 가문의 위세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에곤 실레 어머니의 고향으로 실제로 에곤 실레가 한동안 머물며 작품 활동을 하기도 해 에 곤 실레 아트센터가 있다. 구시가의 중심 스보르노스티 광장에서 시작해 방사형으로 뻗어나 가는 길을 따라 골목 골목 산책하듯 여유롭게 둘러보자.

7. 프라하의 음악

루돌피눔 (Rudolfinum)

프라하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스페인 출신의 첼리스트 파블로 페란데즈와 체코 필하모닉의 드보르작의 레퍼토리를 연주하는 협연이 예정되어있다.

○ 위치 : 구시가 광장에서 도보로 8분 (Alšovo nábřeží. 79/12)
○ 시간 : 19:30 (90분)
○ 요금 : 350CZK부터 1,550CZK까지

클레멘티눔 (Klementinum)

바로크 양식의 아름다운 도서관과 교회, 천문대를 갖춘 복합단지인 클레멘티눔의 거울의 방 (Mirror Chapel)에서 비발디 사계의 연주가 열린다.

○ 위치 : 구시가지 광장에서 도보로 4분 (Mariánské nám. 190)
○ 시간 : 18:00 (65분)
○ 요금 : 450CZK부터

오페라 극장 (Prague State Opera)

체코어 원어로 공연되는 드보르작의 오페라 <루살카>는 인어공주와 내용이 비슷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유명한 아리아들이 많아서 오페라 초보자도 어렵지 않게 관람할 수 있다.

○ 위치 : 바츨라프 광장에서 도보 4분 (Wilsonova 4, Praha 1))
○ 시간 : 19:00 (190분)
○ 요금 : 590CZK 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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