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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유럽을 호령했던 합스부르크 제국의 오랜 수도, 그 위용을 보여주듯 웅장한 건축물과 호 화로운 문화 유산들로 가득한 빈은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하이든, 브람스, 말러 등 클 래식 음악의 큰 별들이 모여들어 눈부신 빛을 내뿜고 잠들어 있는 곳이자 클림트와 에곤 실 레로부터 표현의 자유가, 프로이트로부터 인간 무의식의 개념이 탄생한 문화와 예술, 학문의 성지이기도 하다. 도시 자체가 가진 오랜 역사적 품격 위에 거주지로써의 매력까지 갖추게 된 빈은 현재 세계에서 삶의 질이 가장 좋은 도시, 부동의 1위로 꼽히고 있다.
1. 링 슈트라세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새로운 무기의 등장으로 군사적인 가치를 상실한 중세의 대성벽이 도 시의 확장과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고 판단했다. 대성벽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링(Ring), 링 슈트라세(Ring-straße)라고 불리는 폭 56m, 길이 5.2Km의 순환 도로를 만들었고 링 슈트라 세를 기점으로 빈 대학, 시청사, 부르크극장, 국회의사당, 미술사 박물관, 오페라하우스를 비 롯한 다양한 공공 건축물들을 세워지고 링 바깥쪽을 도심으로 편입하여 오늘날의 모습을 갖 추게 되었다. 대성벽 철거 후 50년 동안, 빈의 인구는 네 배가 넘는 200만 명으로 급증했다. 공간이 바뀌자 거주자의 특성과 산업 구조가 달라지고 사회 분위기와 정치 지형까지도 급변했다. 택지를 개발하고 공공건물과 민간주택을 건설하는 데 엄청난 건축자재와 벽돌과 노동 력이 들어갔다. 가까운 농촌지역뿐 아니라 헝가리, 보헤미아, 발칸반도에서 노동자들이 몰려 와 외곽의 공장지대에 자리를 잡았고 귀족과 신흥 중산층은 도시의 북서 지역의 고급 주택 단지에 모였다. 식품 수요가 폭발하자 인근 농촌지역에서는 자본주의적 영농기업이 우후죽 순 생겨났다. 오로지 소비만 하던 제국의 수도는 다양한 산업과 대규모 노동자 집단을 껴안 은 현대적인 도시로 새로이 재탄생되었고 그 중심이 링 슈트라세였다. 대성벽은 존재함으로 써 중세 도시 빈을 지켰고 (대성벽이 아니였다면 빈은 일찍이 이슬람 세계에 편입되었을지 도 모른다.) 부재를 통해 도시의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성벽은 모든 것을 차단하지만 도로는 모든 것을 뒤섞는다. 성벽이 제거된 자리에 난 길, 대 조적이고 역설적인 공간, 링 슈트라세를 따라 빈을 만나보자. 빈 도심은 공간이 구분이 단순 하다. 대부분의 명소가 링 슈트라세 안팍에 집중되어 위치해 있어 링을 따라 걷거나 링 순 환 트램을 타고 쉽게 둘러볼 수 있다. 원형 도로이긴 하지만 북서쪽 1/4 정도에는 관광지가 별로 없고 문자 그대로 링을 한 바퀴 순환하는 트램 노선은 없기 때문에 링을 한 바퀴 돌아 보고 한다면 최소 한 번의 환승이 필요하다. 여기 링을 오가는 주요 트램 노선 3개를 소개 한다.
1번 트램 : 북동쪽 슈베덴플라츠(Schwedenplatz)에서부터 국립오페라극장 앞 케른트너링 (Karntner ring)까지 링슈트라세 내의 가장 많은 정거장에 정차하는 노선
2번 트램 : 시청사 뒤편을 지나 링슈트라세로 들어오는 노선, 링슈트라세에서는 국회의사당 (Parlamet), 시립극장(Volkstheater), 왕궁(Burgring), 오페라극장/칼스플라츠(Oper, Karlsplatz), 시립공원(Stadtpark)을 지나 슈베덴플라츠(Schwedenplatz)까지 정차
D번 트램 : 벨베레데 궁전(Schloss Belvedere) 방향에서 임페리얼 호텔을 거쳐 링슈트라세로 들어오는 노선, 링슈트라세 내에서는 오페라 극장(Oper, Karlsplatz)에서 부터 쇼텐도어 (Schottentor)까지 정차
★ 국회의사당(Parlamet), 시립극장(Volkstheater), 왕궁(Burgring), 오페라극장/칼스플라츠 (Oper, Karlsplatz)는 세 트램이 모두 정차하는 구간으로 이 구간 내에서 이동한다면 아무 트 램이나 타고 내리면 된다!
★ 모든 트램은 도로 양쪽으로 지나기 때문에 혹시 잘 못 탔다면 당황하지 말고 내려서 길을 건너 같은 번호로 갈아타면 된다!
★ 트램이 링슈트라세 밖으로 벗어나는 순간에 유의할 것!
- 1번 트램은 오페라극장(Oper, Karlsplatz) 과 슈베덴 플라츠(Schwedenplatz)
- 2번 트램은 국회의사당(Parlamet) 과 슈베덴플라츠(Schwedenplatz)
- D번 트램은 쇼텐도어(Schottentor) 와 임페리얼 호텔 앞(Schwarnzenbergplatz)
2. 벨베레데 궁전
벨베레데는 전망 좋은 테라스를 가리키는 건축용어인데 이탈리아 출신 사보이 왕자 오이겐 이 18세기 중반에 지었다. 그 저택을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이 구입한 후 벨베레데라 이름 지었고 황실의 예술품을 보관하고 전시하는 곳으로 사용했다.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한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드 대공이 마지막으로 거주자로 알려져 있으며 2차 세계 대전 때 크게 부서졌다가 완벽하게 복구되었다. 벨베레데 상궁은 종전 후 오스트리아의 독립과 자유가 선 언된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쉔부른 궁전과는 달리 복합 미술관의 성격을 가진 곳으로 두 채의 궁전과 드넓은 정원이 어우러진 바로크 양식의 외관보다도 <키스>를 비롯한 구스 타프 클림트의 컬렉션으로 유명하다. 특히 <키스>는 클림트의 다른 작품과 달리 해외 임대 와 반출을 금하고 있어서 실제 작품은 오직 벨베데레 궁전에서만 감상할 수 있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생전에 자신의 그림에 대해 한 번도 설명한 적이 없고 그저 ‘나에 대해 알고 싶으면 내 그림을 보라’ 라고 말했다고 한다. 보헤미아의 이민자 가정에서 가난한 금 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난 클림트는 보수적인 오스트리아 미술계에서 사실적이고 고전적인 건 축물 프레스코화를 그리며 유명세와 성공을 거두었다. 30대 초반에는 이미 빈에서 가장 잘 나가는 사업가이자 화가였던 그는 빈 분리파, 상징주의, 아르누보, 에로티시즘 등의 키워드 로 잘 알려져있지만 초기에는 고전적인 드로잉, 사실적인 표현력으로 이미 최고의 명성을 얻은 화가였다.
예술적 동지였던 동생의 죽음, 파리에서 일어난 미술계의 새로운 바람으로 클림트의 작품 세계는 큰 변화를 겪는다. 삶과 사랑, 구원과 죽음에 대한 주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낡은 예술과 인습을 따르던 보수적인 빈의 기성 미술계를 대변하는 퀸스틀러하우스를 탈퇴 하고, 빈 분리파를 결성해 자신들의 활동 거점이자 작품 전시를 위해 제체시온이라는 건물 을 지어 그 자신이 리더가 되어 새로운 미술을 추구했다. 제체시온의 입구에는 ‘그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오로지 클림트만의 표현기법으로 역사에 남겨진 장식적이고 그래픽 디자인적인 황금시기의 작품들은, 금 세공 장인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이미 익숙한 소재였던 금 을 활용해 장식적인 특징을 더욱 배가시켰는데, 정기적으로 여행했던 이탈리아의 중세 비잔 틴 예술의 금빛과 모자이크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냐 닙스의 초상> 구스타프 클림트
클림트의 화풍 변화를 보여주는 최초의 초상화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고전적인 묘사를 탈피하고 새로운 화풍을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통적인 초상화에서 드러났던 공 간감을 찾아보기 힘들며, 클림트의 다른 작품들처럼 평면적인 느낌이 강하다. 매우 단순한 구성으로 어두운 고동색 배경에 여인의 옅은 핑크빛 드레스, 빛나는 얼굴 뒤로 색색의 꽃 이 장식적인 이미지로 등장했다.
<해바라기가 있는 정원> 구스타프 클림트
클림트는 50여 점의 풍경화를 남겼는데 전체 작품의 1/4에 해당하는 규모다. 클림트의 풍경 화는 정사각형의 캔버스에 어떠한 공간감이나 입체감도 느껴지지 않는 특징이 있다. 풍경화 는 스케치나 습작없이 휴가 기간 중 그저 명상하듯 그려냈다고 알려져 있다. 자연을 그리면 서도 자연을 사실적으로 재현하지 않았고 수평선을 높이 취하거나 풍경화의 필수 요소인 하 늘을 그리지 않았다. 이 작품에서 클림트는 해바라기의 노란 잎과 붉은색, 보라색, 흰색 등 다양한 색으로 공백없이 화면을 가득 채웠고 작은 꽃잎 하나하나가 모자이크를 이루는 색돌 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이러한 요소들은 결과적으로 캔버스의 평면성을 더욱 부각시키며 클 림트의 다른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장식적인 특징을 느낄 수 있다.
<프리차 리들러의 초상> 구스타프 클림트
이 초상화를 통해 클림트 특유의 장식적인 모티브가 더욱 다양해지고 정교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적으로 그려진 부분은 얼굴과 손뿐이다. 머리 뒤로 보이는 기하학적인 장식은 클림트가 가장 좋아했던 화가 벨라스케스의 <어린 마르게리타 공주>에 대한 오마주로 알려 져 있다.
<핑크 드레스를 입은 마르가리타 공주> 후안 델 마조
스페인의 궁정화가, 벨라스케스의 어린 마르게리타 공주의 초상에서 보이는 공주의 머리모 양 표현을 빌려와 장식적인 요소로 사용했다.
<유디트> 구스타프 클림트
클림트의 황금시기가 본격적으로 열리기 시작한 시기의 작품이다. 회화에서 목이 잘린 남성 의 머리를 들고 있는 여인을 발견한다면, 그 여인은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른 민족의 영웅 유디트이거나 왕 앞에서 춤을 추는 댓가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요구한 요부 살로메이 거나 둘 중 하나이다. 유디트와 살로메는 오랫동안 화가들의 영감을 자극했던 여인들로 캔 버스에 자주 등장해 왔는데, 보통 칼을 들었다면 유디트, 쟁반이 등장한다면 살로메로 해석 한다. (칼과 쟁반이 모두 등장하거나, 잘린 목이 땅에 떨어져 있는 경우도 있다.) 클림트는 이 작품에서 그동안 당차고 지혜로운 영웅으로 묘사되어왔던 유디트에 대한 관념을 완전히 뒤집어 에로틱한 묘사를 통해 표현해 유디트를 살로메와 혼동시킨다. 작품 상단에는 유디트 와 홀로페르네스라고 이름까지 크게 박아 두었는데, 유디트 역시 잔인하게 목을 벤 살로메 와 다를 것 없다는 것을 표현하고자 했다. 똑같이 남성의 목을 베었지만 유디트는 정의롭고 용기있는 여성으로, 살로메는 잔혹하고 교묘하게 목표를 달성한 여성으로 묘사되어왔던 기 존의 표현 방식을 완전히 깨고 스토리적으로도 형식적으로도 파격적인 작품이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살로메와 세례자요한> 구스타프 모로
<키스> 구스타프 클림트
지구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황금비가 내리는 배경으로 꽃들이 가득 핀 벼랑 끝에서 사랑 하는 연인 간에 나누는 키스를 따뜻하고 에로틱한 분위기로 표현했다. 원래 <연인>이라는 제목으로 공개되었는데 두 연인은 하나의 거대한 형태장 안에 속한 모습으로 사랑의 기쁨에 푹 빠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전체를 덮은 화려한 황금빛은 이 키스를 더욱 황홀하게 만든다. 남자는 사각형과 직선을 검정색과 흰색으로 거칠게 표현한 반면 여자는 원형과 곡 선을 다채로운 색채를 사용해 한층 부드러운 형태로 표현한 점이 대조적으로 독특한 조화를 이룬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클림트 평생의 연인이었던 에밀리 플뢰게라는 설이 유력하다. 빈의 코 코 샤넬이라고 불리는 에밀리 플뢰게는 크게 성공한 여성 사업가이자 여권 신장을 위해 노 력했던 인물로 클림트의 정신적 지주였고 클림트 사후 모든 유산을 상속받았다. 클림트가 남긴 600여 통의 편지 중 에밀리에게 쓴 편지만 400통이 넘을 만큼 둘은 깊은 관계였지만 평생 결혼은 하지 않았는데, 여자를 향해 완전히 몸을 튼 남자, 양손으로 여자의 얼굴을 감 싸 안고 있는 남자를 살짝 떼어내려는 듯한 여자의 손과 어딘지 모르게 소극적인 몸짓 그리 고 절벽 끝에 배치한 연인들의 위치에서 언제 깨질지 모를 관계에 대한 불안감과 이 관계의 저울이 어떻게 기울어져 있는지를 엿 볼 수 있다.
클림트와 12년간 연인 관계에 있었던 아델레 블로흐가 자신이 이 그림의 주인공이라 주장 하기도 했다. 아델레 블로흐가 이 그림의 주인공이라면 그림의 해석은 또 달라지게 된다. 17세부터 12년간 클림트와 내연관계에 있었던 아델레는 클림트 사후 클림트의 작품을 위한 방을 만들어 둘 정도로 클림트를 열렬히 사랑했던 인물이라고 전해진다.
그림의 주인공이 누구건 결국 사랑이란 눈부시게 달콤하고 황홀하지만 동시에 불안정하고 위태롭기도 한 이중적인 것이라는 메세지를 전달한다. 두 연인의 포옹의 모습이 제체시온의 프레스코 벽화, 황금 시기의 시작을 알렸던 베토벤 프리즈 중 <온 세계에 보내는 입맞춤> 으로부터 발전되었다는 해석들도 있으니 관심있다면 제체시온에 방문해 확인해보자.
클림트가 ‘새로운 천재가 나타났고, 나의 시대는 끝이 났다.’ 라고 이야기했던 천재 화가가 있었다. 인간의 내밀한 욕망을 거리낌없이 캔버스에 풀어놓은 표현주의의 대가 에곤 실레. 이미 크게 성공한 화가였던 클림트는 어린 에곤 실레에게 모델을 주선해주고 모델비를 지원 하기도 했으며 가난했던 에곤 실레의 그림을 자신의 그림과 바꿔 주기도 했고, 이 재능있는 화가가 크고 작은 전시에 설 수 있도록 다방면으로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사제지간으로 잘 못 알려질 만큼 가까운 사이였고 28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은 깊이 교류하며 서로 큰 영향을 주고 받았는데, 실제로 에곤 실레는 클림트에 대한 존경을 담아 그의 작품 속에 클림트에 대한 오마주를 많이 남겼다.
<죽음과 소녀> 에곤 실레
구도는 클림트의 키스에서 가져왔다고 알려져 있다. 원제는 <남자와 소녀>, 남자는 에곤 실 레 자신이고 여자는 그의 오랜 모델이자 연인이었던 발리 노이질이다. 이 그림은 그가 발리 에게 보내는 이별의 메시지였다. 남자에게 애절하게 매달리는 소녀의 팔은 끊어질 듯 앙상 하게 표현되어 있고 겨우 손가락 하나로 힘겹게 연결되어 있다. 죄책감이 가득한 남자의 눈 과 검은 옷, 한 손으로는 여자의 머리를 감싸고 있지만 다른 한 손으로는 여자의 어깨를 밀 어내며 이제는 헤어져야해 라고 말하듯 둘의 위태로운 관계를 표현했다. 에곤 실레를 너무 사랑했던 발리는 헤어진 후에도 징병된 그를 따라 종군 간호사로 지원했다가 성홍열에 걸려 사망했는데 발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에곤 실레가 그림의 제목을 <죽음과 소녀>로 바 꾸었다.
<바람의 신부> 코코슈카
스위스 바젤의 쿤스트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작품은 또 한 명의 표현주의 화가 오스카 코코슈카의 작품이다. 에곤 실레의 <죽음과 소녀>를 이야기할 때 빠트릴 수 없는 이 작품 속 연인은 코코슈카 자신과 그가 평생 잊지 못한 연인 알마 말러의 모습이다. 알마 말러는 아름다운 외모와 지성을 겸비한 매력적인 여성으로 한때 클림트의 연인이었고 구스타프 말 러의 부인이 되었다가 구스타브 말러 사후 건축가 그로피우스와 결혼을 했고 그와 헤어진 후에는 소설가 프란츠 베르펠과 결혼한 그야말로 바람처럼 자유로웠다. 작품 속 그녀는 곤 히 자고 있지만 그녀를 안지 못하고 두 손을 모은 채 누워 생각이 많은 눈빛으로 허공을 응 시하는 모습은 유부녀였던 알마와 온전히 함께 할 수 없는 자신의 무기력한 상황을 보여주 는 듯하다. 비슷한 구도를 취하고 있는 두 작품의 대조적인 색감과 이야기 때문에 자주 비 교하여 감상되는 작품이다.
<가족> 에곤 실레
에곤 실레의 사실상 마지막 작품으로 불리는 작품이다. 그의 작품에는 대부분 깡마르고 뒤 틀린 인체를 가진 피사체들이 등장해 왔는데 결혼 후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안정된 후에 살 집이 붙고 비교적 정상적인(?) 피사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아내 에디트와의 사랑, 가족의 행복한 미래를 꿈꾸기 시작했던 때에 그려진 작품인데, 1918년 빈 분리파 전시가 대성공을 거두고 메인이었던 에곤 실레의 작품의 완판되자 그 여파로 쏟아지는 초상화 주문과 성공한 화가에게만 돌아가는 부르크 극장의 벽화 작업의 의뢰까지 들어오면서 형편이 좋아지기 시 작한 시기였다. 기존의 퇴폐적인 분위기와는 다르게 컬러가 많이 들어가 있고 아내가 임신 했다는 사실을 듣고서 원래 꽃다발이 있던 자리에 상상의 아이를 그려 넣었다고 한다. 그러 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 유행했던 전염병, 스페인 독감으로 임신 6개월의 아내 에 디트와 뱃속의 아이를 모두 잃게 되었고 얼마 안가 자신마저 스페인 독감으로 아내를 뒤따 라 28년 불꽃같았던 짧은 삶을 마감했다. 같은 해에 클림트가 먼저 스페인 독감에 걸려 사 망했는데 오스트리아는 한 해에 위대한 예술가 두 명을 동시에 잃었다.
3. 쉔부른 궁전
로코코 양식의 여름 별궁인 쉔브룬은 50만 평 대지에 방이 1,400개가 넘는 왕가의 거대한 집이다. 성벽 바깥에 있었던 탓에 오스만 제국 침략에 쑥대밭이 되기도 했지만 18세기 중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에 의해 복원되고 증축되었다. 빈의 베르사유 궁전이라 불리는데 여러 면에서 베르사유와 닮아있다. 제국이 해체되고 궁전에서 박물관으로 바뀌었다는 점, 2차 세 계 대전 막바지에는 국제 회의장으로 썼다는 것, 그리고 궁전의 구조와 건축 양식, 내부 공 간의 배치와 전시품까지도 매우 흡사하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은 쉔브룬 궁전은 베르사유 궁전보다는 덜 사치스럽다는 점이다. 원래는 베르사유 궁전을 능가하는 규모의 건축 계획을 세웠으나 검소하게 보여야 한다는 이유로 규모를 대폭 축소해 지은 것이다. 합스부르크 왕 가가 부르봉 왕가보다 가난해서가 아니라 빈의 지배자들은 프랑스의 왕들보다 권력을 똑똑 하게 행사해서 그랬다. 그랬기에 빈 시민들은 혁명을 일으켜 공화국을 수립할 때 왕의 목을 자르지 않았던 것이리라. 루이 16세의 왕비가 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막내딸 마리아는 사치와 방종을 경계하라는 어머니의 거듭된 경고를 무시하다 결국 단두대에서 최후를 맞이 했다.
쉔부른은 궁전보다 정원이 아름답다. 베르사유의 정원보다 훨씬 작아 둘러보기에 편하고 숲 은 자연 상태에 가깝게 관리되고 있어 공원처럼 정겨운 느낌이 든다. 정원의 한 가운데 언 덕 위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지은 작은 정자라는 뜻의 글로리에테가 있는데, 카페가 있어 정원의 전경을 즐기며 잠시 휴식하기에 좋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역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업적을 세운 통치자이자 유 일한 여성 통치자이다. 이후 제위에 오른 모든 남성의 어머니, 할머니, 증조할머니였다. 아들 이 없었던 카를 6세가 자신이 죽고 딸과 딸의 후손이 영토를 상속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조칙을 만들어 둔 덕분에 권력을 쥐게 되었다. 그때 제국의 재정은 어려웠고 유럽의 정치 정세는 불안했다. 스물네 살 먹은 여자가 왕위에 오르자 주변국에서는 틈만 나면 합스부르 크 변방의 영토를 빼앗으려 했다. 그들은 빈의 젊은 여제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다. 그녀는 뚜렷한 개성과 인간미를 지닌 유능한 통치자였다. 정략결혼을 마다하고 자신이 선택한 남자 와 결혼해 딸 열하나와 아들 다섯을 낳았으며 만만치 않은 외교적 수완으로 남편이 신성로 마제국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게 만들었다. 그녀의 공식 지위는 신성로마제국 황후였지만 실 제로는 40년 동안 제국을 통치한 황제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유능한 남성들을 발탁해 정 부를 혁신하고 민심을 수습했다. 왕권을 강화하고 군대를 현대화했으며 학교와 도서관을 확 충하고 강력한 공중보건 정책을 시행했다. 새로운 형법을 제정해 봉건적인 관습을 대체하고 구빈법을 비롯한 사회정책을 도입하는 등 합스부르크 제국이 140년이나 더 존속할 수 있었 던 것은 그녀 덕분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유능한 군주였다.
4. 슈테판 대성당
슈테판 대성당은 링의 가장 중심에 위치해 있어 빈의 혼이라 불린다. 이 성당을 중심으로 거리들이 혈관처럼 뻗어나간다 해서 빈의 심장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원래는 12세기에 지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이었는데 큰불이 나서 무너졌다. 그 자리에 14세기 초부터 2백여 년 에 걸쳐 새 성당을 지었는데 종교 건축 양식의 유행을 받아들여 중앙 회랑과 지붕을 고딕 양식으로 바꾸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흔적은 성당 전면에만 희미하게 남아있다.
5. 오페라 극장
파리의 가르니에 극장,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과 함께 세계 3대 오페라 극장으로 꼽힌다. 1869년 모차르트의 <돈 지오반니>로 막을 올린 이후 수많은 역사적 공연이 이루어진 빈 음악 예술의 심장부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0년에 걸쳐 재건되어 복구되었는데 1955년 베토벤의 <피델리오>로 재개관했다.
세계적인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극장의 전속 관현악단으로 있으며, 짤쯔부르크 음악제 가 열리는 7, 8월을 제외하고는 매년 300회 이상의 공연이 매일 밤 펼쳐지는 곳이다. 당일 판매되는 4유로 입석 티켓에서 200유로가 넘는 티켓까지 다양한 요금으로 세계 최고 수준 의 공연을 감상할 수 있다.
링 슈트라세에 위치한 빈의 중요한 랜드마크 중 하나이며, 면해있는 케른트너 거리를 따라 링 중심부로 접근할 수 있어 도보 여행의 주요 포인트가 된다. 극장 정면 2층에 배치된 5개 의 동상은 각각 오페라의 주된 주제인 용기, 비극, 환상, 희극, 사랑을 상징하는데, 이것은 또한 중요한 삶의 요소이기도 해서, 이토록 지척에 예술을 두고 일상을 살아가는 이 도시가 왜 매번 삶의 질이 가장 높은 도시에 이름을 올리는지 알 것 같다.
<헤어질 결심>의 OST로 우리에게 익숙한 말러와 20세기 클래식 음악계의 황제라 불렸던 카라얀이 음악감독직을 역임하였다. 음악가들에 대한 존경을 담아 오페라 극장 앞의 광장에 카라얀의 이름을, 실내악 연주 홀에 말러의 이름을 붙여 기리고 있다. 오페라 극장의 뒤편에 있는 알베르티나 미술관의 테라스에 올라 전경을 감상해보자. <비포선라이즈>의 배경이 된 장소로 빈에서 가장 사랑받는 포토스팟이다. 조명이 빛나는 오페라하우스의 야경이 특히 로 맨틱하고 아름답다.
6. 호프부르크 왕궁
역시 링 슈트라세에 면해있고 도심 한 가운데 위치한 왕궁은 원래 중세 시대의 성이었던 곳 으로 13세기부터 왕가의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 왕가의 힘이 커지면서 지속적으로 규모를 확장하여 현재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 16~18세기에 지어진 구왕궁과 19~20세기에 지어 진 신왕궁으로 나누어지며 구왕궁에는 황제의 아파트, 빈 소년 합창단의 공연과 함께하는 미사가 열리는 왕궁 예배당, 스페인 승마학교, 시씨 박물관을 비롯한 여러 가지 주제의 박물 관들이 있고, 신왕궁은 현 대통령의 관저, 국제 컨벤션 센터로 활용되고 있다. 외관상으로 장엄하고 간결한 모습이며 왕궁 앞 헬덴 광장에는 나폴레옹, 오스만투르크에 맞서 승리를 거둔 두 영웅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 양 옆으로 시민 공원과 모차르트의 동상과 함께 높은음자리표 모양의 정원으로 사랑받는 왕궁 정원이 위치해 있다.
왕궁의 외부 성문인 부르크문을 통과하면 길 건너 맞은 편에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동상과 녹지대가 있는 넓은 광장이 있고 각각 미술사, 자연사 박물관이 여제를 바라보며 서 있다. 이곳을 뮤지엄 쿼터라고 부르는데 이 지구에는 에곤 실레의 컬렉션으로 유명한 레오폴드 미 술관을 포함하여 다양한 전시관들이 밀집되어 있다.
7. 빈의 미술악
빈 미술사 박물관 (Kunst Historische Museum)
고대 이집트, 그리스, 로마부터 르네상스와 바로크에 이르기까지 서양 미술사 전반의 컬렉션 을 40만 점 넘게 소장하고 있다. 회화뿐 아니라 조각, 공예품과 왕국의 보물, 무기 등도 전 시하고 있으며 박물관 건물 자체의 매력도 상당해서 오랜 시간 머물며 관람하기 좋다. 세상 에서 가장 아름다운 카페로 알려진 박물관 내부의 쿠폴라 카페와 클림트의 초기 작품인 중 앙홀의 벽화, 합스부르크의 대공들과 황제들이 천 년에 걸쳐 수집한 진귀한 컬렉션이 모여 있는 예술의 방(Kunstkammer)은 놓치지 말자
○ 위치 : 트램 1, 2, D Burgring / 지하철 U2, U3 Museumquartier
○ 시간 : 10:00~18:00
○ 요금 : 21유로
레오폴드 미술관 (Leopold Museum)
에곤 실레에 대해 더 깊이 알아보고 싶다면 레오폴드 미술관으로 가자. 루돌프 레오폴드 부 부가 50년 동안 수집한 작품을 전시한 공간으로 세계 최대 규모의 에곤 실레의 컬렉션을 소유하고 있는 곳이다. 쿠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뿐만 아니라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오스트리아의 근대의 걸작들을 감상할 수 있다.
○ 위치 : 트램 1, 2, D Burgring / 지하철 U2, U3 Museumquartier
○ 시간 : 10:00~18:00
○ 요금 : 15유로
제체시온 (Sezession)
분리한다는 단어의 뜻 그대로 빈 분리파의 활동 거점이었다. 지붕의 동그란 공 모양의 황금 색 월계수 장식 때문에 황금 양배추라는 별명이 생기기도 했다. 입구에는 ‘그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이라는 빈 분리파 예술가들의 모토와 Ver Sacrum 글자를 새겨 두었다. 새로운 예술 사조를 알리기 위해 빈 분리파가 발간한 잡지로 신성한 봄이라는 뜻이다. 클림트의 <베토벤 프리즈>를 보러 가는 곳. 프리즈는 건물 윗부분의 띠 모양 장식 을 지칭하는 용어로 클림트가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소재로 제작한 프레스코화이다. 베토 벤은 거침없이 자신만의 음악을 쏟아냈던 독립적인 아티스트였고 클림트는 늘 베토벤의 음 악을 존경했다. 특히 베토벤 9번 교향곡은 오케스트라에 인간의 목소리를 접목한 최초의 교 향곡으로 베토벤이 22살 때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환희의 송가>를 읽고 영감을 받아 작곡을 결심하고 구상을 시작해 31년에 걸쳐 완성한 곡이다. 종합 예술을 추구했던 빈 분리파의 전당에 너무나 어울리는 이 곡을 주제로 클림트는 높이 2m, 길이 34m의 벽화를 3면에 걸 쳐 그려 넣었다. 이 작품이 완성된 후 이 자리에서 구스타프 말러가 직접 지휘하여 9번 교 향곡<합창>의 4악장<환희의 송가>를 연주했다고 한다. 음악과 시와 함께 <베토벤 프리즈> 를 감상해보자.
○ 위치 : 트램 1, 2, D Oper, Karlsplatz U / 지하철 U1, U4 Karlsplatz 에서 각각 도보 5분
○ 시간 : 10:00~18:00
○ 요금 : 12유로
훈데르트바서하우스 (Hundertwasser-Haus)와 쿤스트하우스 (Kunsthaus wien)
훈데르트 바서는 오스트리아의 화가이자 건축가이고 자연주의 철학자이자 또한 환경운동가 였다. 원래 이름은 프리드리히 슈토바서 (Friedrich Stowasser)였는데 성인이 된 후 프리덴스 라이히 레겐탁 둥켈분트 훈데르트바서(Friedensreich Regentag Dunkelbunt Hundertwasser) 로 개명하고 뉴질랜드 국적을 얻었다. 스스로 지은 긴 이름은 ‘평화로운 땅에서 비 내리는 날 신비로운 천연색으로 흐르는 여러 갈래 강물’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훈데르트바서하 우스는 시정부가 지은 공영임대주택으로 자연주의적 철학을 적용한 건축이다. 흙, 숯, 돌, 벽 돌같은 자연의 재료를 이용했으며 자연의 색을 존중하고 인간이 만든 직선의 경계를 버리고 자연의 곡선에 녹아들도록 집을 지었으며 지붕에 숲을 만들고 발코니에 나무가 자라게 했 다. 인간을 보호하는 피부층을 피부, 의복, 집, 지역사회, 지구로 확대한 스킨(Skin)론을 주장 하며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관계를 강조했고 일생을 환경보호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
○ 위치 : 트램 1 Hetzgasse에서 도보 2분
○ 쿤스트하우스 뮤지엄은 2024년 초까지 임시 휴관
8. 빈의 음악
세계 최고의 오페라 극장과 오케스트라의 공연, 천사의 노래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소년 합창단의 미사, 매년 1월 1일 11시 15분에 무지크페라인 골든홀에서 개최되는 세계적인 전 통 행사인 신년 음악회 등 빈에서는 매일 크고 작은 다양한 공연이 펼쳐진다. 음악의 도시 에 빈에 온 만큼 일정과 버짓, 취향에 맞추어 공연 하나 정도는 관람해 보자.
빈 국립 오페라 하우스 (Wiener Staatsoper)
세계 3대 오페라 극장에서 오페라를 관람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더 있을까?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의 에필로그 격인 <세비야의 이발사> 공연이 예정되어있다.
○ 위치 : Opernring 2, 1010 Wien
○ 시간 : 19:00 (150분)
○ 요금 : 29유로부터 242유로까지 좌석별 상이, 당일 티켓은 09:00부터 공연2시간 전까지
빈 필 오케스트라 (Musikverein Wien)
무지크페라인의 골든홀에서 독일을 대표하는 세계 최정상급의 바이올리니스트인 프랭크 페 터 짐머만과 빈 필 오케스트라의 협주가 있다. 프로그램은 엘가의 <바이올린 협주곡 B단조 op. 61>과 드보르작의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
○ 위치 : 오페라 극장에서 도보 7분 (Musikvereinspl. 1)
○ 시간 : 15:30 (120분)
○ 요금 : 서브스크립션 콘서트로 선판매된 티켓중 캔슬된 수량이 9월 25일 오픈될 예정
세인트앤교회 (Annakirche)
아름다운 내부, 접근성이 좋은 위치 때문에 인기가 많은 공연장이다. 모차르트, 베토벤, 하이 든, 슈베르트의 곡으로 현악 4중주 콘서트가 열린다.
○ 위치 : 오페라 극장에서 도보 4분 (Annagasse 3B)
○ 시간 : 20:00 (70분)
○ 요금 : 33유로
○ 좌석 : 선착순 입장
카를 성당 (Karlskirche)
웅장하고 아름다운 카를 성당에서 고전음악의 걸작인 비발디의 사계를 감상할 수 있다.
○ 위치 : 오페라 극장에서 도보 9분 (Karlsplatz 10)
○ 시간 : 20:15 (60분)
○ 요금 : 49유로
○ 좌석 : 선착순 입장
★드레스코드가 정해져 있지 않지만 최대한 단정한 차림으로 가는 것이 좋다.
★기침 관리를 잘하자. 박수나 호응은 프로그램이 끝난 후에!
★좌석이 지정되지 않은 공연의 경우 늦어도 30분 전에는 도착해서 자리를 잡자.